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프란체스카의 '가없는' 한국 사랑 <4>

by 마우대 2024. 2. 23.

1956년의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제3대 대통령 취임 기념 촬영 사진.

 

다큐영화 '건국전쟁' 이승만 왜곡 바로잡기 단초로 

요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오도된 삶의 궤적을 바로잡기 위해 기획된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대한민국 전체 사회를 뒤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2024년 2월 1일 개봉할 때는 미미했지만 갈수록 관객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큐 영화는 극영화와는 달리 관객 10만 명 돌파가 쉽지 않다고 하지만 건국전쟁은 이를 비웃듯 100만 명 돌파를 향해 달려가는 상황입니다. 독재자, 살인마, 런승만 등으로 손가락질 받던 이승만이 다큐 영화 한 편을 통해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노년의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복 차림으로 이승만 대통령 사진 앞에 서 있다.

 

'잊힌 존재' 프란체스카 여사  떠올린 계기로

자유민주체제 확립과 공산화를 차단한 이승만은 대한민국 출발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북한 '김일성 왕조'와 그를 추종하는 남한의 주사파 세력들에 의해 이승만에 대한 진실이 비틀리면서 대한민국의 뿌리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이승만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벌써 주시하고 평가 했어야 할 '잊혔던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승만의 배우자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1900.6.15~1992.3.19)입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스위스 호텔 식당에서 이승만과 운명적인 만남 

프란체스카는 일제의 만주침략이 국제적 이슈가 되었을 때인 1933년 스위스 레만호반에 있는 한 식당에서 일제의 학정을 국제연맹에 고발하기 위해 찾아간 58세 이승만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어머니와 프랑스를 거쳐 스위스 여행 중 이 식당 4인용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중 지배인이 찾아와 '동양에서 오신 귀빈'과의 합석 요청을 승낙한 것이 이승만과 질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국민과 함께 한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예를 갖춘 동양 신사에 신비한 힘 느꼈다"

그가 주문한 메뉴는 절인 배추와 소시지 하나, 감자 2개가 전부일 정도로 초라했지만 "본 아뻬띠(bon appetit, 맛있게 드세요)!"라고 예를 갖추는 동양신사에게 어떤 신비한 힘을 느꼈다고 해요.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코리아!"

프란체스카는 독서클럽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금강산'과 '양반'을 언급, 이승만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이 독립해야 아시아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 이승만 신문기사를 본 프란체스카는 기사를 오려 호텔 안내에게 맡김으로써 '그냥 스친 인연'이 아닌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지면서 고생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의 결혼 사진(왼쪽).  신혼 때의 모습(오른쪽)

 

"서양 부인 데려오면 동포 돌아서니 혼자 오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여곡절 끝에 1934년 10월 8일 미국 뉴욕 콘클레어 호텔 특별실에서 이승만과 결혼식을 올린 프란체스카에게는 고통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라 잃은 무국적자 독립투사의 아내로 삶을 꾸려 나가야 하는 것은 물론 외국인 신부에 대한 나쁜 인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결혼 직후 하와이 동포들이 남편에게 보낸 전보에서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 테니 혼자 오시라"라는 내용을 담겨 있어서 그녀를 서글프게 만들었다고 해요.

 

어린 시절의 프란체스카.

 

한복 맵시에 반한 프란체스카 어디서나 한복 차림

그러나 이승만은 소신껏 프란체스카를 대동하고 하와이에 갔는데, 이 박사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접한 수많은 동포들이 부두에 나와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김치와 고추장 담그는 법도 배우고 윤치영(尹致暎)씨 부인이 지어준 한복을 입어보고 그 맵시에 반한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도,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각종 공식적인 자리에는 늘 한복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규칙적인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항상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합니다. 

 

1965년 3월 하와이에서 90세인 이승만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는 프란체스카 여사.

 

'폭풍운전' 습관에 장작패기로 울분 다스린 이승만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을 보면 이승만이 얼마나 절제되면서도 열정적인 삶을 꾸려나갔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았으며, 화 나는 일을 당하면 장작패기로 울분을 다스렸고, 포토맥 강변이나 호수를 찾아 낚시를 즐겼지만 반드시 잡은 고기를 놓아주었으며,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거나 세계 곳곳을 누비며 한국 독립을 주창하느라 늘 바빴던 탓인지 '폭풍 운전'을 하는 습관 등이 그것입니다. 한 번은 뉴욕에서 워싱턴 프레스 클럽 강연장까지 차를 몰고 갔는데 어찌나 빨리 달렸던지 이를 단속하려던 두 대의 기동경찰 차량이 이승만 차를 세우는데 실패했다고 합니다.  

 

승용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프란체스카 여사.

 

과속 단속 당한 뒤 프란체스카가 운전대 잡아

프레스 클럽 강연장까지 따라온 단속 경찰관들은 이승만이 연단에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에 대한 열변을 토하는 장면을 접하고 청중들과 함께 박수까지 쳤다고 합니다. 연설이 끝난 뒤 그들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다가와 "기동경찰 20년 만에 따라잡지 못한 유일한 교통위반자가 당신 남편이오. 더 일찍 천당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라는 '경고'를 날린 뒤 돌아갔답니다. 이 사건 이후로 프란체스카가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5년 1월 신혼여행을 마친 이승만 부부가 하와이 호놀롤루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

 

동시통역사·속기사 자격 갖춘 능력 있는 '新여성'

프란체스카는 빈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스코틀랜드로 유학 가서 영어통역사와 속기사 자격까지 취득할 정도로 '능력 있는 신(新)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능력은 당연히 돈도, 조직도 없는 독립투사 이승만과 대통령 이승만에겐 '최고의 비서' 역할을 하는 바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제국의 미국 침략을 예고한 '재팬 인사이드 아웃(JAPAN INSIDE OUT)'을 저술할 때 '타자수'로, 영어문장을 다듬어준 수준 높은 ' 퇴고자(推敲者)' , 대통령 영부인이 되어선 6.25 전쟁의 참화 속에 나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땐 3개국 비밀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혁혁한 공(功)'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941년 6월에 출판한 이승만의 저서 'JAPAN INSIDE OUT'. 이승만은 이 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실상을 고발하면서 향후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펼칠 것이라고 예견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 책을 저술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61년 이승만 대통령이 86세때인 '이승만 양자'가 된 이인수 박사와 조혜자 여사 부부. 이인수 박사는 2023년 11월 1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하와이서 이승만 임종 지키고 1970년 영구 귀국

1960년 이기붕(李起鵬) 일당에 의한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된 4.19 의거 때 경찰의 발포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데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승만 곁에는 프란체스카만이 남겨졌습니다.  하와이로 따라가 고국 땅에서 묻히기를 갈구하는 이승만을 다독이면서 수발을 했고, 1965년 90세인 남편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프란체스카는 고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가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5년 후인 1970년 귀국, 이화장(梨花莊,2008년 4월 국가문화재로 승격)에서 양자 이인수(李仁秀·2023년 11월 1일 별세) 박사 부부와 여생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화장은 1947년 지지자들이 돈을 모아서 이승만에게 사준 집이었고, 이승만은 이곳에서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고 건국 정부를 조각했다고 합니다. 

 

한국인 '프랜시스카 또나'의 주민등록증.

 

"棺 속에 남편 친필 휘호 '남북통일' 넣어달라" 유언

전직 대통령 가족 자격으로 연금을 받았지만 가계부까지 꼼꼼하게 적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영위한 프란체스카 여사.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 금요일이면 남편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는 등 한국 최초 퍼스트 레이디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았습니다. "관 속에 태극기와 성경책, 남북통일(南北統一)이라는 남편의 친필 휘호를 넣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프란체스카는 1992년 3월 19일 9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묘소에 합장되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휘호. 한국인과 한국 사랑의 정신이 가득하다.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격랑을 헤쳐나간 '숨은 여걸'

'기구한 여자의 일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구(岐嶇)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①산길이 험하다 ②(사람의) 세상살이가 순탄하지 못하고 가탈이 심하다>로 풀이됩니다. 파란 눈의 오스트리아 여성이 여행 중 우연히 식당의 한 식탁에 동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58세 독립투사 이승만을 만나 그의 아내가 되고 갖은 고생 끝에 대통령 영부인까지 된 프란체스카. 1950년 4월 종로구청에 혼인 신고를 하면서 호적상의 이름은 '프랜시스카 또나'로 등재되었습니다. 이승만을 사랑한 죄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뒤 끝내 한국인이 되어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격랑의 인생길을 헤쳐나간 '숨어있는 여걸' 프란체스카 또나의 존재와 가치도 건국전쟁을 통해 부활하기롤 소망해 봅니다.

 

검소한 삶을 영위한 프란체스카 여사가 꼼꼼하게 기록한 가계부.

 

"이 세상 당신을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은 나" 

마지막으로 프란체스카 여사가 얼마나 이승만을 사랑했는지를 표현한 연서(戀書)를 소개합니다. 이승만 기념관에 따르면 '연서'는 시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시가 아니라 편지로 쓰인 글을 시 형식으로 새롭게 번역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단 4줄에 불과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끔찍한 사랑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절절한 사랑이 있었기에 그 험난한 시기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이승만 곁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스트리아 여성이었던 '프란체스카 도너'는 진정한 한국여성 '프랜시스카 또나'로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1992년 3월 23일 프란체스카 여사 영결식 장면.

 

《戀書 - 프란체스카 리》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한 명은 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사람 있다면 그중에 한 명은 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것은 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당신, 나의 연서를 듣고 있나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 이곳에는 1992년 사망한 프란체스코 여사가 합장되어 있다.

 

 

 

마우대의 인생골프, 역사이야기는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