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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역사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3>

by 마우대 2024. 2. 19.
2024년 1월 23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역사의 길'에 디지털로 재현한 광개토대왕릉비. 이 디지털 비는 높이 8m, 너비 2.6m 규모이며 한학자 청명 임창순(1914~1999)이 소장했던 원석 탁본을 토대로 빠진 부분을 보완해서 제작되었다. (사진 =연합뉴스)

 

한민족 역사 5천 년... 중국 諸 왕조와 밀접한 관계 

 

한민족, 즉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가 5천 년에 이른다고 자랑합니다. 고조선(古朝鮮)을 시작으로 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 등 3국(國) 시대에 이어 대조영(大祚榮)의 발해(渤海),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마진(摩震)-태봉(泰封), 견훤(甄萱)의 후백제(後百濟), 신라 등 후삼국시대,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숱한 왕조가 명멸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이런 왕조들은 중국 대륙의 왕조들과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흥망성쇠를 거듭했습니다. 중국 왕조는 하(夏) -상(商) 또는 은(殷), 주(周) → 서주(西周), 동주(東周),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진(秦),  한(漢)/서한(西漢), 동한(東漢) →위촉오(魏蜀吳) 삼국, 진(晉)/서진(西晉), 동진(東晉)→ 5호 16국(五胡十六國), 남북조(南北朝)/남조(南朝), 북조(北朝) → 수(隋), 당(唐), 5대 10국(五代十國) →송(宋) →원(元) →명(明) →청(淸)으로 이어집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 위에서 내려다 본 장군총의 모습. (사진 =연합뉴스, 나무위키)

 

중국 땅 '우리 史錄' 턱없이 부족한 안타까운 현실

 

이번 편에서는 문헌(文獻)과 같은 사록(史錄)이 턱없이 부족하면서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과거엔 '우리 조상들이 지배'한 '우리 조상의 땅'이었던 '우리의 역사'가 중국에 짓밟힐 가능성이 높아진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24년 1월 디지털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를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비석은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0)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재위 391~413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중국 땅에 있어서 쉽게 볼 수 없으니 디지털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석은 우리 땅이 아닌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에 위치해 있습니다. 700년이 넘는 고구려 역사에서 첫 도읍 이전은 졸본(卒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두 번째는 국내성에서 평양(平壤) 옮겼는데 그 국내성이 오늘날 지안 일대입니다. 그곳에는  돌무지무덤, 즉 적석총(積石塚) 여럿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장군총(將軍塚)과 태왕릉(太王陵)이라고 해요.

 

중국 지린성 지안에 있는 태왕릉. 태왕릉에서 200~300m 떨어진 지점에 광개토대왕비가 있어 학계는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사진 = 동북아역사넷)

 

기록 부실로 장군총·태왕릉 주인 '특정' 못해

 

장군총은 지안 시가지에서 동쪽으로 7.5㎞ 정도 떨어진 곳에 있고 태왕릉은 장군총에서 서남쪽으로 2㎞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장군총과 태왕릉의 주인이 누구의 것인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일각에서는 태왕릉은 광개토대왕으로, 장군총은 장수왕릉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릉의 거리가 200~300m에 불과해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두 왕의 릉(陵)마저 오늘날 우리가 특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를 확실히 증명할 문헌, 즉 사료(史料)와 기록(記錄)이 없기 때문입니다. 태왕릉에서 '호태왕(好太王)' 이 새겨진 청동 방울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는 정도죠. 이 약점을 틈타 중국 역사학계와 정부는 상고사인 고조선 역사는 물론 고구려, 발해 역사도 모두 자기 것이라고 우긴 지 오래되었습니다. 

 

중국 항저우(杭州) 문란각 소장 사고전서(四庫全書, 복제품). 사고전서는 1773년 청 제국의 건륭제의 명으로 1781년에 편찬 및 완성된 총서이다.

 

사료 부족한 약점 노린 중국, 우리 것을 자기 것으로 우겨

 

중국의 이런 '억지 행태'에 대해 우리 사학계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와 발해 등의 각종 유물이 저들의 땅에 있는 데다 우리 정부나 사학계가 확보하고 있는 사료마저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거기다 36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일제(日制) 통치를 거치는 과정에서 우리 역사를 비튼 식민사관(植民史觀)에 기초한 '역사 관리'가 이뤄진 점도 선조들이 누볐던 강역(疆域)이 쪼그라든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인 심백강 박사는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 찾아낸 고조선의 사료들을 통해 고조선 강역을 중국 북경 근처까지로 넓힌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이라는 책을 펴내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심 박사는 중국의 문헌을 파고들어 고조선의 강역을 들춰냈지만 대학 강단에서 활동하는 주류 사학자들이 웅대한 강역의 고조선이 아닌 반도 중심의 초라한 반쪼가리 고조선으로 한정하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역사학자 심백강 선생이 펴낸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과 '중국은 역사장 한국의 일부였다'의 책 표지.

 

"역사 잊은 민족 미래 없다"... 정부·역사학계 대오각성 필요

 

심 박사는 이외에도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한국상고사 환국' 등의 저서를 통해서 잃어버린 우리 선조의 발자취를 찾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정부와 우리 주류 역사학계의 대오각성이 요구됩니다. 재야사학자들이 제시한 근거나 주장을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단 한치의 우리 강역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사명감으로 치열한 연구와 논쟁에 임해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역사전쟁(歷史戰爭)' 이라고까지 했을까요.

 

중국은 김치도 자기 것이라고 억지부리는 등 호시탐탐 우겨서라도 온갖 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중국 대륙의 제국들에게 휘둘린 과거의 맥 못 추는 왕조 국가가 아닌 세계 10대 경제 강국입니다. 10대 경제 강국에 걸맞은 역사의식을 가질 때가 된 것입니다. 휴대폰 등 전자제품이나 선박, 자동차도 잘 만들어야 하지만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국가적 대응과 국민적 관심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 첫 단추가 중국의 사료에 꼭꼭 숨어있는 우리 선조들의 흔적을 철저히 찾아내서 '우리 역사'임을 확인해 놓아야 합니다.

그 광활한 땅을 되찾고야 말 '미래'를 위해서!

 

 

마우대의 인생골프, 역사 이야기는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