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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이야기

한국 골프의 '뿌리' 연덕춘을 아시나요? <41>

by 마우대 2023. 4. 10.

골프 인구 600만 명. 전체 인구 100명 중에서 12명이 골프를 치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있습니다. 

지구를 놓고 볼 때 눈꼽만한 면적(10만 339㎢)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이 바로 그곳입니다.  

 

대한민국을 품고 있는 한반도(22만2천㎢)는 태평양에 접한 동북아 끝단 외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계은행 통계 상으로는 대한민국의 국토 면적은 전 세계 229개 국가 중 109위에 불과합니다. 가장 넓은 나라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로 면적은 무려 1천709만 8천㎢에 이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현재 한국의 총 인구 수는 5,155만 명. 그런데 이 가운데 약 12%인 600만 명이 골프를 친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어린이, 노약자 등을 뺀 경제활동 인구로 따진다면 골프 인구 비율은 훨씬 더 올라갈 것입니다. 6.25 전쟁이 끝날무렵인 1953년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던 세계 최빈국이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그런데 70년 만인 2020년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1,881달러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한국 골프 인구 600만명...'골프 뿌리'를 찾아서

사치성에서 대중 스포츠로 자리잡아...'상전벽해'

골프 인구 급증은 경제력이 커지는 것과 궤를 같이합니다. 가계 소득이 는데다 국가 경제력이 커지고 여유가 생기면서 골프장 증설과 함께 골프 인구도 늘어난 것입니다. 가난에 허덕일 때 골프는 사치성 스포츠로 질시를 받았고, 국가 정책이 골프장 신설을 억제하고 공직자들의 골프장 출입도 감시했습니다. 기업인들이 골프장에 자주 드나들면 세무조사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600만명이 골프를 즐길 정도로 대중스포츠로 자리 잡았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요,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프로골퍼 1호인 고 연덕춘 프로의 샷 모습(왼쪽). 1941년 일본 오픈에서 우승한 뒤 받은 트로피.(중간, 오른쪽)

 

한민족은 시조로 고조선의 단군을 떠올리고 각 성씨는 저마다 시조를 모십니다. 대한민국 골퍼 600만명의 '시조(始祖)'이자 '뿌리'는 누구일까요? 저는 바로 고(故) 연덕춘(延德春, 1916~2004)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대한민국 골퍼라면  '골프 시조' 연덕춘 프로가 누군지 알아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 골프의 뿌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프로 골퍼 1호 연덕춘은 캐디로 출발...일본서 유학 

경기도 고양군 뚝섬(지금의 서울 뚝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연덕춘은 16세때인 1932년 집과 가까운 군자리 골프코스(현재 서울 성동구 어린이공원 자리)에 캐디 마스터를 하는 조카를 만나러 갔다가 조카의 제안을 받고 캐디 마스터 보조역을 맡으면서 골프와 인연을 맺습니다.
 

고 연덕춘 프로가 캐디로 근무했던 군자리골프장 클럽하우스.

 
골프에 흥미를 느낀 연덕춘은 군자리 골프장 클럽 프로인 일본인 시리마스로부터 클럽 하나를 얻은 뒤 비지땀을 흘리며 연습을 한 결과 실력이 일취월장합니다. 때마침 시리마스가 병이 들어 귀국하면서 클럽 프로 자리가 비자 경성골프클럽 측은 이미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는 연덕춘을 일본에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1934년 일본 가나가와현 후지사와골프클럽으로 유학을 간 연덕춘은 일본오픈 우승자이자 클럽 헤드프로 나카무라로부터 본격적인 골프 수업을 받은 결과 1935년 2월 일본 관동골프연맹으로부터 프로자격증을 획득, 한국인 1호 프로골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일본 도쿄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일본오픈에 처음 참가했지만 예선 탈락의 쓴 맛을 경험합니다.
 

고 연덕춘 프로가 사용했던 골프클럽(왼쪽). 연덕춘 프로의 제자이면서 6대 KPGA 회장이자 초대 KLPGA 회장을 역임한 한장상 프로.

 

6번째 도전 일본 오픈서 우승 기적...일본 언론 대서특필

한국으로 돌아와 경성골프클럽 헤드프로로 일하면서 군자리골프코스에서 맹연습을 하며 기량을 닦아나갑니다. 일제의 요구에 따라 창씨개명에 응해 '노부하라'라는 일본 이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25세 때인 1941년 태평양 전쟁 직전에 열린 일본오픈에 6번째 도전, 4라운드 합계 2 오버파 290타로 당당하게 우승컵을 들어 올립니다. 그가 기적같은 우승을 한 뒤 우승트로피를 들고 귀국하자 경성역에서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고, 일본 언론들도 그의 우승을 크게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터지고 골프장이 없어지는 등의 곡절을 겪은 연덕춘은 1956년 자신이 키운 고 박명출(1929~2009)과 함께 지금의 월드컵 골프대회 전신인 캐나다컵에 한국 대표로 출전, 대한민국 골프를 세계무대에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42세때인 1958년 6월 국내 첫 프로대회인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에 출전한 연덕춘은 2위와 16타 차로 첫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일본 오픈 우승 이후 17년 만의 쾌거로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후배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남자골프계를 주름잡았던 최상호 프로(왼쪽). 1차 여자프로 테스트에서 선발된 구옥희 프로는 일본 무대에 진출, 23승을 거뒀고 미국 여자프로골프대회에 출전해 첫 우승을 기록한 한국 여성 골퍼가 됐다.

 
연덕춘은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를 창설한 데 이어 '골프양성원'이라는 아카데미를 통해 제자를 길러내는데도 주력했습니다. 한장상, 홍덕산, 이일안, 강영일, 조태운 등 오늘날 1세대 프로 골퍼들이 연덕춘의 열정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연덕춘은 KPGA 창립때 상무 겸 징계위원장을, 1972년에는 제2대 KPGA 회장에 올라 협회를 반석에 앉히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오늘날 KPGA는 매년 선발전을 통해 남자 프로들을 배출하고 있고, 그들 중에서 일본, 아시아, 유럽, 미국 무대로 진출해 잇따라 우승행렬을 펼치고 있습니다. KPGA 창립은 여성 프로골퍼들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5년 11월 KPGA 이사회를 통해 여성프로골퍼 육성을 처음 논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 무대인 PGA와 LPGA에 진출, 다승을 기록하며 골프 붐을 일으킨 최경주 프로(왼쪽). 박세리 프로(중앙), 김미현 프로(오른쪽).

 
이 이사회 결의에 따라 여자프로골퍼를 선발하기로 하고 1978년 5월 26일 로얄(지금의 레이크우드) CC에서 프로테스트를 실시해 강춘자, 한명현, 안종현, 구옥희 등 4명을 선발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자 프로 골퍼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어 8월 10일에 실시된 2차 프로 테스트에서 김성희, 이귀남, 고용학, 배성순 등이 합격했고, 협회는 여자 프로부를 신설했습니다.  

여자부 회원 수가 48명으로 늘어나자 KPGA는 1988년 12월 정기총회를 통해 여자 프로부를 별도의 사단법인인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로 분리시켰습니다.  초대 KLPGA 회장은 연덕춘 프로의 제자인 한장상 프로가 맡았습니다.

이처럼 일제강점하에서 18세때 캐디로 골프와 인연을 맺은 1호 프로골퍼 연덕춘은 한국 골프의 시작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연덕춘이 없었으면 한장상, 최상호, 구옥희, 최경주, 박세리, 김미현, 박인비, 신지애, 고진영, 김주형이라는 스타 프로골퍼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 스타 골퍼의 맹활약에 힘입어 오늘날 대한민국 골프 인구 600만 명 시대를 맞을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실로 연덕춘의 공은 지대합니다. 
 

LPGA 무대에서 세계 랭킹 1위를 달리며 한국 여성 골프의 위력을 과시했던 박인비 프로(왼쪽), 고진영 프로(중앙), 신지애 프로(오른쪽).

 
연덕춘. 그래서 그를 대한민국 골프의  '씨앗'이자 '시조(始祖)'로 부를 수 있는 겁니다. 프로골퍼이든, 아마추어골퍼이든 클럽을 잡을 때마다 연덕춘 프로의 존재 가치를 떠올려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골프인구 600만명 시대를 맞아 고 연덕춘 프로의 발자취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마우대의 인생골프 이야기는 이어집니다.